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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집

[트집-4] ‘당신의 아이를 찾으시오’ 공익 광고의 문제

 

 

 

아이의 보호자가 아이를 달래려고 스마트폰을 보여 주고는 한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광고는 그런 일을 삼가라고 한다. 많은 공익 광고가 그렇듯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먼저 맞춤법부터 보자. 광고 하단 문구는 맞춤법에 맞지 않는다. ‘쥐어준’이 아니라 ‘쥐여준’으로, ‘잠식시킵니다’가 아니라 ‘잠식합니다’로 고쳐야 한다. ‘쥐어준’으로 쓰면 아이가 아니라 보호자가 스마트폰을 쥐었다는 뜻이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게 하는 것이므로 사동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이’를 더해 ‘쥐여준(혹은 쥐여 준)’이라 해야 한다. 그리고 ‘잠식하다’는 ‘누에가 뽕잎을 먹듯이 점차 조금씩 침략하여 먹어 들어가다’라는 뜻으로, 굳이 사동의 뜻을 지닌 ‘-시키다’를 더할 필요가 없다. ‘잠식시키다’로 쓰면 스마트폰이 누군가에게 아이의 뇌를 먹어 들어가라고 시키는 꼴이 된다. 그러니 이 문장은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잠깐 쥐여준 스마트폰, 아이의 뇌를 잠식합니다’로 고쳐야 한다.

 

상단 문구는 맞춤법에는 맞지만 논점에 어긋난다. 이 광고의 논점은 아이에게 해를 끼치는 비도덕적 행위(스마트폰 보여 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 아이를 찾’으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마트폰이 얼굴을 가려 아이를 찾기 어려워지는 것은 도덕적 문제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스마트폰 때문에 아이를 못 찾을 가능성은 매우 작다. 그렇다면 너무 많은 사람이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여 줘서 문제라는 것인가? 많은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많은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도 문제라 해야 한다. 많은 부모가 아이의 뇌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나쁜 행위를 많은 사람이 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더 나쁜 일이 되지는 않는다. 즉 ‘많은 부모가 아이의 뇌를 파괴하는 행위를 한다’는 말은 사실을 기술(記述)한 것에 불과하며 그 행위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결국 ‘당신의 아이를 찾’지 못하는 것은 도덕과 무관한 현상이다. 도덕적 내용을 전하면서 도덕과 무관한 문구를 내세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 광고의 요구가 정당한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나마 쉽고 확실하게 아이를 달랠 수 있는 방편이 스마트폰이다. 이 광고는 ‘당신이 힘들더라도 당신의 아이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를 하지 말라’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보호자가 겪는 고통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 고통도 악(惡)이다. 보호자가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않아 발생하는 악의 총량을 A, 보호자가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주어 생기는 악의 총량을 B라 했을 때 A가 B보다 크거나 둘의 크기가 비슷하다면 이 광고의 요구는 과한 것이다. 물론 A와 B를 정확하게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B가 A보다 ‘중요’하거나 클 수 있다. 상식적·직관적 차원에서 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우선한다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 광고의 요구가 정당하려면 적어도 대안을 제시하는 성의는 보여야 한다. 이 광고는 보호자들이 실제로 겪는 고통에 지나치게 무심해 보인다. 요컨대 비현실적이다.

 

이 광고에서 지적하는 현상이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개선할 필요가 있는 광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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