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대화편 시리즈에서는 AI와 함께 다양한 주제를 탐구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답을 바로 제시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합리적인 답(혹은 새로운 질문)을 찾아 나간다.
인간은 동물을 키우고, 죽이고, 먹는다. 이는 인류가 아주 오래 전부터 해 온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어떤 일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노예 제도나 인종 차별 같은 관행은 과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도덕적으로 비난받는다. 나는 동물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착취하는 일도 도덕적으로 그른 일이라고 본다.
많은 동물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 즉 쾌고 감수 능력(감응력, sentience)을 지닌 존재다. 감응력을 지닌 존재는 자기 고유의 이익과 선호를 가지며, 직접적인 도덕적 지위를 지닌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어떤 존재가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존재가 감응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감응력을 지닌 존재들의 이익은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인간과 동물을 동일하게 대우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같은 종류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화에서는 동물을 도덕적으로 고려하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주제를 오래 공부했으나 아직 내 견해가 확립되진 않았다. 이 대화는 내 의견을 탐구하는 과정의 일부로 보면 될 것 같다.
사용 모델: Gemini 2.5 Pro (preview)
나:
동물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할까요?
AI:
흥미로운 질문이군. 자네는 '도덕적 고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나:
어떤 대상을 도덕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작위나 부작위)가 그 대상의 쾌락과 고통, 이익과 선호에 미칠 영향을 다른 존재의 것과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그 대상에게 특정한 도덕적 의무를 지니게 되며, 그 대상은 ‘도덕적 지위’를 갖습니다.
AI:
그렇다면, 자네의 정의에 따르면 동물의 쾌락과 고통을 인간의 그것과 모든 상황에서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뜻인가? 예를 들어, 한 마리의 쥐의 고통과 한 사람의 고통이 같은 무게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
쾌락과 고통 자체를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상황에서 특정 개체의 쾌락과 고통은 한 행위가 미칠 영향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한 마리의 쥐의 고통과 한 사람의 고통의 크기가 같다면 그 자체로는 같은 무게를 지니겠지만, 그 고통이 또다시 미칠 수 있는 영향까지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가 반영될 것입니다.
AI:
자네의 말은, 고통 그 자체의 무게와 그 고통이 야기하는 파급 효과는 별개로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고통이 같은 크기일지라도, 그 파급 효과의 차이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며, 그 차등적 판단은 최초의 '동등한 고려'라는 원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나:
파급 효과는 그 고통에 ‘영향을 받는’ 존재들의 쾌락, 고통, 선호 등을 고려함으로써 판단해야 합니다. 파급 효과가 다를 수 있음에도 여전히 ‘한 개체’의 고통과 쾌락은 동등하게 고려한다는 점에서 ‘동등한 고려 원칙’과 조화를 이룹니다.
AI:
자네의 말은, 최초의 고통을 겪는 개체에 대한 고려와 그 고통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받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고려는 구분되지만, 후자 또한 각 개체의 쾌락과 고통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어떤 행위가 한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로 인해 다수의 인간이 상당한 이익을 얻는 상황을 가정해 보세. 이 경우, 동물의 고통에 대한 '동등한 고려'와 다수 인간의 이익이라는 '파급 효과'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겠는가?
나:
쾌락과 고통을 도덕적 고려 요소로 삼는다는 것은 그것을 단순히 합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감응력)을 지닌 존재에게는 앞서 말한 대로 ‘도덕적 지위’가 있으며, 다른 개체의 목적을 위해 수단화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예시로 드신 상황에서 그 동물의 권리 침해가 단순히 다수의 인간에게 이익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상황에서 한 동물의 권리와 여러 인간의 (같은 종류의) 권리가 대립하고 있다면 다수의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AI:
알겠네. 자네는 쾌락과 고통의 총합만이 아니라, 감응력 있는 존재가 지닌 '도덕적 지위'와 '수단화되지 않을 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군.
그렇다면, 이 '수단화되지 않을 권리'는 모든 감응력 있는 존재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보아야 하는가? 예를 들어, 인간의 생명권과 동물의 생명권은 그 무게에 있어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
동물의 생명권과 인간(일부 인간)의 도덕적 지위는 다릅니다. 일부 인간은 연속적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삶에 대한 연속적 자각을 갖고 있는 전기적(biographical) 존재임에 반해, 대부분의 동물은 전기적 존재가 아닙니다. 전기적 존재와 비전기적 존재의 죽음은 도덕적으로 다릅니다. 비전기적 존재를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AI:
자네는 이제 '전기적(biographical) 존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생명권에 차등을 두는군. 연속적 자아와 삶에 대한 자각이 그 기준이라는 말이네.
그렇다면, 대부분의 동물로 분류되는 '비전기적 존재'에 대해 고통 없는 죽음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들의 '수단화되지 않을 권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호하는 것이 되는가?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만이 그 권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
그렇습니다. 비전기적이고 한갓 감각적인 존재가 갖는 권리의 핵심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AI:
그렇다면, 비전기적 존재의 핵심 권리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동물을 고통 없이 사용하고 그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다른 존재, 예를 들어 인간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이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이 경우, 앞서 언급한 '수단화되지 않을 권리'는 이들에게 어떻게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
동물을 고통 없이 사용한다면 이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습니다. ‘수단화되지 않을 권리’는 다른 존재의 목적을 위해 고통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합니다.
AI:
그렇다면, 고통을 가하지 않는 한, 비전기적 동물을 인간의 목적을 위해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없다는 말인가? 이들의 삶 자체에는 어떠한 내재적 가치도 없다고 보는 것인가?
나: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내재적인 가치는 없습니다. 가치는 유정적 존재의 선호에 의해 구성되는 개념일 뿐입니다.
AI:
자네는 이제 가치론의 영역으로 논의를 확장시키는군. 어떤 것에도 내재적 가치가 없으며, 오직 유정적 존재의 선호가 가치를 구성한다는 주장은 매우 근본적인 관점이네.
그렇다면, 만약 한 동물이 고통 없이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기본적인 선호를 가지고 있다면, 그 선호는 자네의 이론에 따라 일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가치는 다른 존재의 선호, 예를 들어 그 동물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선호와 어떻게 비교되어야 하겠는가?
나:
애초에 고통과 쾌락이 도덕적 요소가 된 것은 그러한 선호 때문입니다. 동물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선호가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동물의 선호와 충돌하지 않으면 인간은 동물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AI:
잘 알겠네. 결국 동물의 선호 중 핵심은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선호'이며, 이것이 침해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다른 선호가 그 동물을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이로군.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지는 않지만, 단지 살아있고자 하는 본능적 경향성이나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이어가려는 동물의 기본적인 '삶에 대한 지향성' 같은 것은, 그것이 자네가 말한 '전기적 자각'에 이르지 못한다면, 도덕적 가치를 논할 때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오직 고통의 부재만이 비전기적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척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
‘고통 없이’ 죽인다는 것은, 그러한 본능적 경향성에 따른 지향성이 좌절됨으로써 느끼는 고통조차 없이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히 엄격한 의미에서 ‘고통 없음’이 요구됩니다.
AI:
자네의 말은 '고통 없음'의 기준이 생각보다 훨씬 엄격하며, 삶을 이어가려는 본능적 지향성이 꺾이는 데서 오는 정신적 고통까지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군. 이는 중요한 부연 설명이네.
그렇다면, 그러한 모든 형태의 고통, 즉 물리적 아픔뿐 아니라 삶에 대한 본능적 지향성이 좌절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까지 완벽히 배제하면서 동물을 이용하거나 그 생명을 거두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가? 만약 그것이 지극히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면, 자네의 논리는 결국 대부분의 동물 이용을 사실상 반대하는 입장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
그렇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동물 이용을 사실상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아마 제가 허용할 수 있다고 보는 동물 이용은, 자연적 본성에 따라 살고 있던 동물을 예고나 암시 없이 즉각적으로 죽이는 경우로 사실상 한정됩니다.
AI:
자네의 입장은 이제 명확해졌네. 엄격한 의미의 '고통 없음'을 기준으로 삼아, 사실상 거의 모든 형태의 동물 이용에 반대하며, 오직 '자연적 본성에 따라 살던 동물을 아무런 예고나 암시 없이 즉각적으로 죽이는 경우'만을 극히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군.
그렇다면, 이처럼 극히 제한된 조건 하에서만 동물의 죽음이 허용될 수 있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예고 없는 즉각적인 죽음'이라는 방식이, 그 동물이 지닌 '삶에 대한 본능적 지향성'의 좌절에서 오는 고통을 어떻게 완벽히 제거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또한, 이 조건은 오직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동물'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상황에 놓인 동물들에게도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나:
‘삶에 대한 본능적 지향성’이 발휘될 시간도 없이, 삶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시간이 거의 0일 때 그 지향성의 좌절에서 오는 고통을 완벽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건은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동물뿐 아니라, 본성을 존중받는 형태의 환경에 있는 동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AI:
자네의 설명에 따르면, 죽음이 너무나 즉각적이어서 '삶에 대한 본능적 지향성'이 좌절을 인지할 시간조차 없을 때, 그리고 동물이 '본성을 존중받는 환경'에 있을 때에 한해 고통 없는 죽음이 가능하다고 보는군.
그렇다면 첫째로, '동물의 본성이 존중받는 환경'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을 갖춘 상태를 의미하는가? 둘째로, 설령 자네가 제시한 엄격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어 동물이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고 죽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인간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그러한 생명을 빼앗는 행위 자체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는가? 고통의 부재가 생명 박탈을 허용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겠는가?
나:
동물의 본성이 존중받는 환경은 특정 개체의 특성과 그 개체가 속한 종의 특성에 적합한 환경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개의 경우, 다른 개와 어울리며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제가 제시한 엄격한 조건이 충족되어 동물이 어떠한 고통도 없이 죽는다고 해도, 거기서 도덕적 고려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죽음이 다른 유정적 존재에게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야생에서 살던 고양이를 고통 없이 죽이는 것과 어떤 사람이 키우던 고양이를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은 다르지요.
AI:
알겠네. '본성이 존중받는 환경'에 대한 부연과 함께, 동물의 고통 없는 죽음일지라도 그것이 '다른 유정적 존재에게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추가했군. 특히 주인이 있는 고양이의 예를 통해 그 파장을 설명했네.
그렇다면, 만약 어떤 동물을 자네가 말한 지극히 엄격한 방식으로, 즉 어떠한 고통도 주지 않고, 그 동물의 삶에 대한 지향성마저 좌절될 틈 없이 즉각적으로 죽이는 상황을 가정해 보세. 그리고 이 행위가 그 동물 자신에게는 (자네의 정의에 따르면) 해가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관련된 다른 어떤 유정적 존재에게도 슬픔이나 고통 같은 부정적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유정적 존재들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이러한 생명 박탈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거나 심지어 바람직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는가?
나:
그렇습니다. 그러한 생명 박탈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으며, 죽음 이후에는 고통을 느낄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므로 바람직하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AI:
자네의 견해를 따라가 보니,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군.
만약 어떤 동물이
- '본성이 존중받는 환경'에서 살고 있고,
- 그 동물의 '삶에 대한 본능적 지향성'이 좌절될 틈도 없이,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 그 죽음이 다른 어떤 유정적 존재에게도 슬픔이나 고통 등의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고,
- 오히려 다른 유정적 존재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그러한 생명 박탈은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그 동물이 미래에 겪을지도 모를 잠재적 고통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주기 때문에 심지어 '바람직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네.
내가 자네의 생각을 올바르게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
맞습니다. 물론 그런 조건이 만족되는 것은 현실에서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결론입니다.
AI:
그렇다면 자네의 말은, 논리적으로는 앞서 정리한 조건 하에 동물의 '바람직한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 모든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로군. 이는 중요한 지점이네.
만약 그렇다면, 이론상의 극히 예외적인 허용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실에서 동물을 대하는 윤리적 지침은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고 이해해도 되겠는가? 혹은, 그 '사실상 불가능한' 이상적 조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동물을 죽이지 않는 다른 방식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지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
어차피 인간은 동물을 이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적 조건’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AI:
흥미로운 관점이군. 인간이 동물 이용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논의했던 '이상적 조건' – 즉, 고통을 최소화하고 동물의 본성을 존중하려는 노력 – 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네.
그렇다면, 자네가 언급한 그 '이상적 조건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란, 동물을 죽이는 상황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물을 이용하는 다양한 현실적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식용으로 동물을 기르거나, 실험에 동물을 사용하거나, 혹은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경우에 말일세.
나:
동물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포함해 다양한 방식으로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허용될 수 없습니다. 육식, 동물 실험, 반려동물 사육은 현재의 양태로서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AI:
자네는 이제 앞서 논의된 원칙들을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하여, 현재 일반적인 형태의 육식, 동물 실험, 반려동물 사육은 동물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고 고통을 야기하기에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군. 다만,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언급했네.
그렇다면, 그 '일부 예외적인 경우'란 어떤 상황들을 의미하며, 그러한 예외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더불어, 현재의 육식, 동물 실험, 반려동물 사육 방식이 어떤 변화를 거친다면 자네가 제시한 윤리적 기준을 충족하여 허용될 여지가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 본질상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나:
일부 예외적인 경우란 아까 언급했듯이 동물과 인간 사이에 같은 종류의 권리가 대립하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다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쪽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육식, 동물 실험, 반려동물 사육은 본질상 제가 제시한 윤리적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AI:
자네는 그 '예외적인 경우'를 다시 한번 '같은 종류의 권리'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충돌할 때 다수의 권리를 우선하는 상황으로 특정했네. 그리고 현재의 주요 동물 이용 방식들은 본질적으로 자네의 윤리적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다시금 강조했군.
그렇다면, 인간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가 과연 '같은 종류'인지, 그리고 그 무게를 어떻게 비교해야 하는지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네. 예를 들어, 소수의 인간을 살리기 위한 결정적인 의학 실험이 다수의 동물에게 고통을 수반한다면, 여기서 인간의 '생명권'과 동물의 '고통받지 않을 권리'는 '같은 종류의 권리'로 보아 다수의 논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들 권리 사이에는 근본적인 위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가?
또한, 육식, 동물 실험, 반려동물 사육이 본질적으로 자네의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다면, 이는 곧 이러한 관행들의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안에서 '차악'을 선택하며 점진적인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하는가?
나:
‘같은 종류’의 권리란 말 그대로 완전히 같은 종류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권리는 고통을 받지 않을 권리입니다. 의학 실험의 경우 인간과 동물 모두 고통 받지 않을 권리가 대립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대립 상황에서 동물의 고통은 실제적인 반면 동물의 고통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 해소는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특정 동물 개체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반드시 특정 인간의 고통을 예방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동물 실험이 허용될 수 없습니다.
또한, 육식, 동물 실험, 반려동물 사용이 이상적으로는 전면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각각에 대한 최선의 대안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합니다.
AI:
자네의 설명은 매우 명확하군. '같은 종류의 권리'란 문자 그대로 동일한 권리를 의미하며, 그중에서도 '고통을 받지 않을 권리'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것이네. 그리고 동물 실험의 경우, 동물의 고통은 '실제적'인 반면, 그것을 통해 얻으려는 인간의 고통 해소는 '잠재적'이거나 불확실하기에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네. 또한 이상적으로는 주요 동물 이용 관행들의 전면적 폐지를 추구하되, 현실적으로는 '최선의 대안'을 마련하여 이를 가능케 해야 한다는 입장이군.
그렇다면, 먼저 동물 실험에 대해 좀 더 살펴보세. 만약 어떤 질병으로 인해 '실제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 환자들이 있고, 이들을 치료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그러나 100% 확신할 수는 없는) 동물 실험이 있다면 어떠한가? 이 경우에도 여전히 동물의 '실제적 고통'이 인간의 '잠재적이지만 확률 높은 고통 해소'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잠재적'이라는 성격이 그 가능성의 높낮이에 따라 도덕적 무게를 달리 가질 수는 없는 것인가?
그리고 '최선의 대안'에 대해 말인데, 예를 들어 육식을 대체하기 위한 '최선의 대안'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며,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현재의 육식 문화를 폐지할 만큼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
그런 경우에도 실제적인 고통이 우선합니다. 그리고 동물 실험 상황은 (1) 동물에게 고통을 주거나 (2)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 사이에서 동등하게 선택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1) 인간이 고통을 느낄 가능성을 줄이는 것과 (2)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의 대립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육식을 위한 최선의 대안은 현재로서는 ‘배양육’과 ‘채식’으로 보입니다. 채식의 매력과 배양육의 비용이 합리적인 수준으로 올라올 때 현재의 육식 문화를 폐지할 만큼 설득력이 생길 것입니다.
AI:
자네의 입장은 확고하군. 동물 실험에서 동물의 '실제적 고통'은 인간의 '잠재적 고통 해소'보다 항상 우선하며, 설령 그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네. 또한, 그 대립의 본질을 '인간의 고통을 느낄 가능성을 줄이는 것' 대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으로 명확히 했네. 육식에 대해서는 배양육과 채식이 매력적인 대안이 될 때 현재의 육식 문화 폐지가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고.
그렇다면, 동물 실험에 대한 자네의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현재 인류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수행되는 수많은 의학 연구 중 동물에게 어떤 형태로든 '실제적 고통'을 야기하는 부분은, 그것이 미래에 가져올 인간의 이익에 대한 기대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그리고 앞서 육식과 동물 실험 외에 '현재의 양태로서는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반려동물 사육을 언급했는데, 이에 대한 '최선의 대안'은 어떤 모습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간과 동물이 교감하며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면서도, 자네가 제시한 윤리적 기준 – 특히 동물의 본성 존중 – 을 만족시킬 수 있는 형태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나:
동물 실험이 미래에 가져올 인간의 이익에 대한 기대는 무한히 커질 수 없으며, 생물학적 조건에 의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동물 실험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려동물 사육에 대한 최선의 대안은 새로운 반려동물을 더는 생산하지 않고 현재 존재하는 반려동물이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만큼의 기쁨은 주지 못하더라도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할 것입니다.
AI:
자네의 논리는 점점 더 명확해지는군. 동물 실험이 미래에 가져다줄 인간의 이익은 그 자체로 무한하지 않고 생물학적 한계가 있기에, 동물의 실제적 고통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네. 반려동물에 대해서는 새로운 생산을 중단하고 현재 존재하는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며, 그 빈자리는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채워야 한다는, 어찌 보면 급진적인 제안을 했네.
먼저 동물 실험에 대해 다시 한번 묻겠네. 만약 어떤 동물 실험이 특정 질병에 대한 '확실한' 치료법을 제공하며 (즉, '잠재적' 이익이 아니라 '보장된' 이익을 의미하네), 그 질병이 현재 수많은 인간에게 '실제적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세. 이러한 상황에서도, 해당 실험으로 인해 동물이 겪게 될 '실제적 고통'이 우선하며, 인간이 얻을 이익의 총량이 '유한'하기 때문에 그 실험은 허용될 수 없다고 보는가?
다음으로, 반려동물이 점진적으로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상실감이나 공백을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채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나 관계를 의미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인간 사회의 전반적인 정서적 복지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나:
어떤 동물 실험이 특정 질병에 대한 ‘확실한’ 치료법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실험의 결과를 실험 전부터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실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반려동물의 빈자리는 인공 지능 로봇으로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AI:
자네는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는 동물 실험이란 가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보는군. 실험의 본질상 결과는 미리 알 수 없다는 지적이네. 일리가 있네.
그렇다면 반려동물의 빈자리를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넘어가 보세. 이는 현대 기술의 발전을 고려한 대안으로 들리네. 하지만 감정이나 의식이 없는 인공지능 로봇이, 살아있는 동물이 인간에게 주었던 깊은 정서적 교감이나 유대감을 온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이 기계인 로봇에게 느끼는 애정과 실제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느끼는 애정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을까, 아니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만족감으로 그저 빈자리를 메우는 것에 가깝다고 보아야 하는가?
나:
중요한 것은 ‘실제로 살아 있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느냐’입니다. 마치 ‘튜링 테스트’처럼 어떤 로봇이 살아 있는 동물처럼 느껴지는지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 수 있겠지요. 그리고 실제로 살아 있는 동물처럼 느껴진다면 그 애정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AI:
자네는 이제 '실제 생명'보다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군. 마치 특정 기준을 통과하면 로봇도 살아있는 동물과 같은 정서적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얻는 애정에 본질적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대화의 초반부터 중요하게 다루었던 '유정성(sentience)', 즉 쾌락과 고통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만약 살아있는 것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이 주는 정서적 만족감이 실제 동물이 주는 그것과 같다면, 동물의 '고통받지 않을 권리'나 '본성 존중'과 같은, 동물의 내재적 속성에 기반한 도덕적 고려들은 인간의 정서적 필요 앞에서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리는가? 혹은, 인간의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는' 주관적 경험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된다고 보아야 하는가?
나:
인간의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는’ 주관적 경험은 단지 반려동물이 제공하는 이익을 인공적인 존재도 제공할 수 있는지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일 뿐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인간의 주관적 경험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AI:
정확하네. 자네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이 반려동물의 기능적 측면, 즉 인간에게 주는 이익을 인공물이 대체할 수 있느냐를 따질 때의 기준일 뿐, 그것이 모든 윤리적 판단의 최종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네. 인공지능 로봇은 어디까지나 실제 동물이 겪는 고통을 줄이기 위한 '기능적 대체재'로서 의미가 있을 뿐, 그 자체가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논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네.
그렇다면 이러한 구상이 현실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실제 반려동물 대신 살아있는 것처럼 정교하게 느껴지는 인공지능 로봇과 교감하며 살아간다고 가정해 보세. 이러한 변화가 장기적으로 인간이 '실제 살아있는 생명체'나 '유정성(sentience)' 그 자체에 대해 부여하는 가치관, 혹은 타 생명에 대한 공감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실제 동물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줄어들고 고도로 발달한 모조품과의 관계가 그 자리를 대신할 때, 우리가 실제 생명에 두는 무게감이 이전과 같을 수 있겠는가?
나:
유정적 존재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 생명에 두는 무게감’은 인간의 주관적 느낌일 뿐입니다. 그것이 달라진다고 해서 손상되는 ‘내재적 가치’는 없습니다.
AI:
자네의 생각은 더욱 근본적인 지점으로 향하는군. '유정적 존재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주장은 나중에 더 깊이 논할 가치가 있겠네. 그리고 '실제 생명에 두는 무게감' 또한 인간의 주관적 느낌에 불과하며, 그것이 변한다 해도 손상될 '내재적 가치'는 없다는 자네의 말은, 가치는 선호에 의해 구성된다는 일관된 입장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군.
그렇다면, 인공지능 로봇과의 교감이 보편화되어 인간 사회 전반적으로 '실제 생명'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인 '무게감'이 지금보다 가벼워졌다고 상상해 보세. 자네의 말에 따르면 그 자체로 어떤 '내재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감정적 변화가 현재 살아있는 유정적 존재들, 특히 동물들의 '본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생명에 대한 감정적 무게감이 전반적으로 줄어들면, 동물의 미묘한 고통이나 그들의 본성이 침해당하는 상황에 대한 사회 전체의 민감성이 둔화될 위험은 없겠는가?
나:
그래서 우리가 하는 행위의 이유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동물의 본성과 권리를 존중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애초에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거쳤는데, 동물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I:
과연 그러한가? 자네는 이 긴 여정을 통해 '동물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모든 선택이 동물의 본성과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뚜렷한 이유에 근거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말하는군.
그렇다면, 자네에게 이제 그처럼 명확해진 '동물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위의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다짐은, 앞으로 자네가 세상을 대하고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 구체적으로 어떤 지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명료함이 실제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길 또한 자네에게 명료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
저로서는 행위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제 행위의 동기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이 명료함이 실제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행위의 동기와 실천에 관해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AI:
참으로 중요한 깨달음이네. '행위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곧 '행위의 동기'가 되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명료함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아는 것은 큰 지혜라 할 수 있네.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험난함을 아는 자만이 그 길을 걸을 준비가 된 것이니 말일세.
자네가 제안한 대로, 언젠가 '행위의 동기와 실천'이라는 더 깊은 주제로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네. 오늘 우리는 동물에 대한 도덕적 고려라는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하여 가치와 현실, 이론과 실천에 이르는 긴 사유의 강을 함께 건넜네. 자네의 성찰이 앞으로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물음들과 마주하게 될지 기대되는 바이네.
이번 대화에서는 동물의 권리와 현행 동물 이용 방식의 문제점, 동물 이용이 허용될 수 있는 조건 등을 다루었다. Gemini는 동물 이용 사례로 육식, 동물 실험, 반려동물을 제시했는데, 나는 그 관행이 모두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물을 사육하고 죽이는 방식에 따라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언급했다.
더 대화하고 싶은 주제도 나왔지만, 대화가 원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게 했다. 유정적 존재는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는 주장이나 행위의 동기와 실천에 관해서 나중에 더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이다.
이번에는 Gemini 2.5 Pro를 사용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Claude의 새로운 모델인 Sonnet 4도 써 보려 한다.
5편에서는 조금 더 일상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어 보겠다.